- 기자, 이래현
- 기자, BBC 코리아
제79주년 8.15 광복절을 맞아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30년 간 한국 정부가 고수해온 통일구상에 약간의 보완을 곁들인 새로운 '자유 통일' 비전을 밝혔다. 기존에 정부가 고수해 온 통일구상에서 자유주의 철학을 반영해 새 통일담론으로 계승한 것으로 분석된다.
윤 대통령은 이날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79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분단 체제가 지속되는 한 우리의 광복은 미완성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1919년 3.1 운동부터 산업화, 민주화를 이룩한 역사를 '자유를 향한 위대한 역사'로, 남북통일을 이루는 시점을 진정한 광복과 건국의 완성으로 본다는 게 대통령실의 설명이다.
지금까지 역대 정부의 통일정책을 관통하는 키워드로 자주, 평화, 민주 등이 꼽혔던 한편 윤 정부의 통일 정책에서는 자유와 인권이 도드라지게 강조된 것으로 보인다.
윤 대통령이 제시한 통일을 위한 3대 비전으로는 '자유와 안전이 보장되는 행복한 나라', '창의와 혁신으로 도약하는 강하고 풍요로운 나라', '세계 평화와 번영에 기여하는 나라'가 올랐다. 또 3대 전략으로는 '자유 통일을 추진할 자유의 가치관과 역량 배양', '북한 주민의 자유 통일에 대한 열망 촉진', '자유 통일 대한민국에 대한 국제적 지지 확보'를 들었다.
3대 전략 중 첫 번째인 '가치관과 역량' 관련 윤 대통령은 “가짜뉴스, 사이비 지식인은 반자유 세력, 반통일 세력”이라며 “자유의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했다. 국민들이 진실의 힘을 가지고 디지털 사이버 산업의 발전을 악용하는 세력에 맞서야 한다는 점도 언급했다. 이에 야당과 비판 세력을 겨냥한 발언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두 번째 과제인 "북한 주민의 자유 통일에 대한 열망 촉진"에 대해선 북한 주민들이 다양한 경로로 외부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정보 접근권'을 확대하겠다고 말했다. 대북 전단 살포를 계속해서 허용하며, 대북 확성기 가동 또한 활성화하겠다는 의미가 내포된 것으로 보인다. 윤 대통령은 이와 더불어 ‘북한 인권 국제회의’를 추진하고 ‘북한 자유 인권 펀드’를 조성하겠다고도 밝혔다. 북한이 응할 가능성은 적어 보이지만 재작년 광복절의 '담대한 구상'에서 밝힌대로 "비핵화의 첫걸음만 내디뎌도 정치적, 경제적 협력을 시작할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마지막 세 번째 과제로 '국제적 지지 확보'에 대해 윤 대통령은 “뜻을 같이하는 국가들과 함께 ‘국제한반도포럼’을 창설하겠다”며, “동맹 및 우방국들과 자유의 연대를 공고히 하면서, 우리 통일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에 새롭게 발표된 '8.15 통일 독트린'은 한반도 긴장이 극도로 고조된 상황에서 제시됐다. 북한은 남쪽을 향해 '오물 및 쓰레기 풍선' 살포를, 한국을 북쪽을 향해 '대남 전단' 살포와 '대북 확성기 방송' 재개를 실시하면서 남과 북의 갈등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이에따라 북한의 인권 실상과 비핵화 등 최근 부상하고 있는 북한 관련 이슈들을 반영해 통일방안을 새롭게 마련한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윤 대통령의 이번 발표에 대해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임을출 교수는 "통일정책은 영구불변의 것이 아닌 국민의 뜻, 정부의 결정, 시대상황의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보완될 수 있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 임 교수는 "특별히 임팩트를 가질 만한 새로운 내용은 없지만 남북 당국 간 실무차원의 '대화협의체' 설치를 처음으로 제안한 것이 눈길이 간다"고 말했다.
한편 북한대학교 대학원 양무진 교수는 "정부의 8.15 통일 독트린에 새로운 것이 없다"며 "그 동안 현 정부가 내세운 자유, 인권 가치에 의한 통일추진을 재정리한 것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양 교수는 또 "당초 남북 화해협력을 기반으로 하는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수정해보려 했으나, 현 정치 지형 하에서 여야 합의를 통한 새로운 통일방안을 대체하기 불가하다고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30년간 유지되어 온 '통일방안'
지난 30년간 한국의 통일구상은 여러 정부를 거치며 변화했다. 특히 남북관계와 국제 정세에 따라 각 정부는 통일에 대한 다른 접근법을 가지고 비전을 제시해왔다.
1989년 9월 노태우 정부 시절 ‘한민족 공동체 통일방안’이 여야 합의로 마련됐다. 완전한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 남북간의 교류와 협력을 통해 먼저 민족공동체를 회복 발전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가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를 계승해 발표한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 지난 30년 간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적용했던 통일방안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이전 정부가 발표한 통일방안을 보완해 세계적인 탈냉전과 1992년 발효된 ‘남북기본합의서’ 등 새로운 국면을 반영한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1994년 8.15 경축사를 통해 밝혔다.
이 통일방안은 화해와 협력, 남북연합, 통일국가 신설의 3단계 통일을 구상하고 있으며, 자주, 평화, 민주라는 세 가지 원칙에 의거해 자유와 복지, 인간 존엄성이 구현되는 선진 민주국가를 실현하자는 비전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 방안이 처음 발표됐을 당시만 해도 북한 인권이 크게 주목받지 못했고, 특히 북핵 문제가 대두되지 않았던 때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보완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후 정권에서는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의 기본 틀은 유지하되, 남북 정세에 따라 대북 정책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다.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에서는 북한에 대한 포용과 협력을 통해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공존’과 ‘상호 번영’을 더 강조하는 정책을 수립한 한편, 이명박 정부는 ‘비핵·개방 3000’ 구상을 통해 북한의 비핵화를 북한 지원의 전제 조건으로 삼았다.
박근혜 정부 역시 기존의 통일방안을 공식적으로 바꾸려하지 않았으나, 통일을 경제적 기회로 바라보며 남북 간의 신뢰를 구축하는 것을 중점에 뒀다. 문재인 정부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통해 기존 통일방안의 평화적 통일 구상을 구체화하고자 했다.
윤석열 정부에 들어서며 남북관계는 긴장의 최고점을 맞이했다. 한편 윤 대통령은 올해 3.1절 기념사에서도 통일을 여덟 번이나 언급했으며, 대통령실은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던 통일방안에 자유주의적 철학 비전이 누락되었다며 새롭게 수정, 보완하겠다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의 핵심 가치인 자유주의 철학과 비전을 반영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윤 정부의 새로운 통일구상 발표에는 북한의 핵 문제, 인권 상황 등과 더불어 북한 내에서의 정책 변화 또한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최근 북한은 통일과 민족 개념을 폐기하는 등 대남 정책에 변화를 보였다. 특히 김정은은 ‘적대적 2국가론’을 제시하며 기존의 통일 개념을 폐기하고 남북한을 서로 다른 독립된 두 개의 국가로 간주한다고 선언했다.
김정은의 '두 국가론'
북한은 작년 연말 노동당 전원회의와 지난 1월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북남관계는 더 이상 동족관계, 동질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로 고착되었다고 주장했다. 남북한 사이에서 전쟁이 벌어질 경우 자신들의 헌법에 “대한민국을 완전히 점령, 평정, 수복하고 공화국 령역에 편입시키는 문제”를 반영하겠다고도 말했다. 휴전선도 ‘국경선’이라고 칭하고 나섰다.
김정은의 ‘두 국가론’은 북한이 한반도 통일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북한을 각각의 주권을 가진 별개의 국가로 인정해달라는 요구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통일과 민족 개념은 앞선 김일성, 김정일 정권을 관통해온 정치적 명분이었다. 한국에 위협은 가하면서도 1민족 1국가 연방제통일과 ‘우리민족끼리’의 정신에 입각한 통일 대원칙은 일관되게 유지해 온 만큼 북한 사회 내의 핵심 가치이기도 했다.
실제로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이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 의사를 밝히자 ‘두 개의 조선 책동’이라며 북한이 반발하고 나섰고, 1991년 남북한이 유엔에 함께 가입하면서 두 국가로 인식되자, 그해 12월 남북기본합의서 협상 때 2국 체제를 완강히 거부했다. 그랬던 북한이 통일 노선을 전환하며 ‘두 국가론’ 선언하고 나선 것은 통일 목표를 사실상 포기할 것이며, 독립된 국가로서의 길을 가겠단 의지를 나타낸다.
북한이 이와 같이 ‘두 국가론’을 주장하고 나선 데는 여러 배경과 분석이 제기된다.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북한이 무력 통일의 명분을 갖추고자 노선을 전환했다는 분석이 그 중 하나다. 통일연구원 홍민 연구위원은 “북한이 가장 원하는 목표는 핵보유국 지위를 미국에게 승인받는 것”이라며 “북한 입장에서 핵보유국 승인을 가장 반대하는 장애물이 한국”이기 때문에 “한국을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로 개입하지 못하도록 차단하기 위해 완전한 절연을 꾀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했다.
이 외에도 북한이 남북 간 국력 비대칭의 상황에서 통일 공세를 지속하는 것이 현실적이지 않다고 판단했다는 평가도 있다. 이미 국력 경쟁과 인구, 국제적 지위 및 명성, 경제력 등 북한이 한국과 비교했을 때 통일 경쟁에서 뒤쳐지고 있기 때문에 체제 유지에 위협을 느끼고 흡수 통일의 가능성을 최소화하고자 하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글로벌파이어파워가 발표한 2024 세계 군사력 순위에서만 봐도 한국은 세계 5위, 북한은 36위를 차지했다.
한편 일각에서는 김정은 정권이 북한 내부에서, 특히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한 변화에 대한 위기감이 크게 작용하면서 체제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두 국가론을 주장할 수 밖에 없다는 분석도 나온다.
북한의 젊은 세대가 한국의 K팝과 드라마, 영화 등 대중문화를 동경하고, 이를 통해 한국에 대한 긍정적인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북한 체제에 대한 위협적인 요인으로 떠올랐다는 것은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북한 내에서 한국에 대한 동경심이 커지게 되면 현 정권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주민들의 탈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때문에 북한은 어떻게든 사회의 결속력이 약해지는 것을 막고, 두 국가론을 통해 한국과의 명확한 분리를 강조함으로써 위기를 타파해야 한다는 분석이다.
이에 대해 피터 워드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은 과거 북한 당국이 한류에 대해 “남풍(南風)이나 한류는 절대 안 된다면서도 한국인들은 우리 민족이기 때문에 동조 대상이라고 하는, 앞뒤가 안 맞는 상황이었다”면서 그러나 이제는 “같은 민족이 아니기 때문에 한류를 차단해야 하고 한류를 접하게 되면 범죄라는 논리가 강화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